우리에게는 '하고싶은 일' 보다 '하기로 한 일' 이나 '해야만 하는 일'이 더 많다. 이것들을 잘 해내기는 쉽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할때면 틈만 나면 계속 딴 생각이 든다.
'담배가 한대 피고 싶은데'
'수다가 떨고 싶네'
'미래가 불안해'
'게임 딱 한판만 하고 일하자'
'유튜브 잠깐만 보고 집중해야지'
'술이 한잔 하고 싶네'
'현재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애들은, 와이프는 잘 살고 있나?'
'아 지겨워. 하기싫어. 도망가고 싶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비전이 있는 걸까?'
'이런 시시하고 반복적이고 지겨운 일로 평생을 마쳐야 하는 걸까?'
'다른 것이 더 좋아보이는데 방향을 바꿔야하나?'
'일에 비해 보수는 적은데,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나는 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걸까?'
...
이 잡념들은 감각적 쾌락, 조바심, 의심, 욕심, 불안, 불만 등으로 다양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지금 상태로부터 도망칠려는 무의식의 다양한 변명들에 불과하다.
왜 무의식은 우리를 이렇게 현실의 의무로부터 도망치도록 유도할까?
사실 무의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현실의 의무, 현재의 상태가 싫기 때문이다.
왜 싫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불만이나 욕심이 있을 수 있다.
내가 투입해야 하는 수고대비 보상이 작다고 느낄 때이다.
확 때려치고 싶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으니 그때까지 적당히 버티자는 심리다.
하지만 조금 깊게 들여다보면 의외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이유가 될 때가 많다.
누구나 실수나 실패의 매를 맞기는 두렵다. 아프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더 아픈 사람이 있다.
왜 더 아플까? 아마도 살아오면서 실수를 했을때, 격려보다는 비난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 더 아플 것이다. 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실수를 실패라는 용어로 바꾼다.
설사 그렇더라도
성숙한 인격이라면
그것이 실수든 실패든, 아프든 안 안프든,
어차피 맞을 매 빨리 맞자 하고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유약한 인격은 그 매를 맞기가 두렵다. 그렇다고 뒤꽁무니를 보이며 줄행랑을 치는 용기도 없다.
유약하고 용기없는 무의식은 그것을 두려움으로 솔직하게 표현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두려움을 비틀어 허영, 가식, 과대포장 등의 생각을 의식으로 밀어올린다. 그래서 딴 일이 하고 싶다거나, 나는 대단한 사람인데 이런 자질구레한 일이나 하고 있어야 되겠어? 라는 엉뚱한 생각들이 만들어 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 행위들은 나중에 후회, 불안등이 더해져 자존감을 더 떨어뜨린다.
자신에 대한 불만과 결핍감이 남게되고 이런 회피행동이 반복되면서 영원히 결핍을 채울수 없다는 불안까지 더해진다.
이렇게 후회하면서도, 계속 반복하게 되며 점점 더 악화되는 현상.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바로 중독증상이다.
우리는 회피에도 중독된다.
하지만 회피는 명확하게 치명상을 남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폐해를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회피를 줄일 수 있을까?
결심하면 될까? 안된다. 결심으로 중독을 끊을수 없는것과 같다.
고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회피의 순간을 알아채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만약 회피의 순간을 운좋게 캣치했다면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해야할 의무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도망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지금 당장 편할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누적된 괴로움을 감당할 것인가?
답은 어느쪽이든 좋다. 현실과 의무로부터 도망가도 된다.
하지만 나중에 감당할 괴로움을 고려하고 '자신이 선택'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중독도 선택할 수 있다. 과보를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눈만 감지 말자.
자기 합리화하는 생각의 장난을 알아채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민낯을 마주볼 수 있을때, 그것을 인정할때,
비로써 변화는 시작된다.
나는 의지가 있는가?
나의 중독을, 중독을 벗어날 수 없는 무능함을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변화하고 싶은 의지는 있는가?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귀기울여 보면 의외로
'아니다. 나는 변화가 싫다. 의지가 없다'라는 대답이 들릴때가 있다.
이걸 듣는 순간이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중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