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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괴롭지 않게, 원하는 것을 이뤄내기

당신은 덜 괴롭고,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가? 원론적으로는, 괴로움을 참고 버틴 보상인 '기쁨'이 클때만 '원하고', 괴로움이 더 클 경우에는 '원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원하지 않기'가 쉽지많은 않다. '원하지 않기' 도 자세히 보면 그것을 없애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해봤자 달성될 가능성도 낮고 괴로움만 크니, 이제 원하지마!' 라고 마음에 명령을 내렸을 때 그것이 딱 내 맘대로 멈춰지는가? 보통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불수의근'과 같다. 마치 위장에게 '지금 먹은 밥, 소화시키지마' 라고 명령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표현은 내 맘대로라고 하지만, 실제로 내 맘은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이다. ' 이제 만족하고 더이상은 원하지 마!' 라고 '원하는' 데, 되지 않으니 괴로워진다.

만약 '원하지 않기'가 어렵다면 '괴롭지 않기'는 어떨까? 이것도 원하지 않기 만큼이나 어렵다. 마음에게 '괴로워해봤자 아무 도움도 안되. 괴롭지 마' 라고 했을 때 괴로움이 멈춰질까? '원하지 않기' 나 '괴롭지 않기' 모두 마음의 영역으로, 내가 손이나 발을 움직일 때처럼, 내 의도대로 되지는 않는다.

결과가 내 맘대로 안되기에, '과정을 즐겨라', '결과에 집착하지 마라', '진인사대천명' 같은 명언들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안되면 포기하라',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등의 책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이 괴로운가 보다. 그런 책을 볼 때는 잠시 '아 그렇구나' 한다. 하지만, 또 어느새 원하는 것의 결과에 집착하고 후회하고 조바심내고 괴로워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없을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본질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고 행동한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건강, 예쁜 배우자, 훌륭한 자식들, 지적 능력, 좋은 아파트, 고급 차, 고급 옷, 명품 악세서리, 맛난 음식, 여가시간, 여유,... 지식, 존경받음, 권위, 명예, 지적 능력,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이 모든 것에 필요한 돈,....또 무엇이 있을까? 지구의 공전주기, 세계평화, 타인의 마음을 바꾸기 등 내 컨트롤 영역밖의 것들을 빼면 대부분 이 범주안에 들어갈 것이다.

인간도 생명체이다. 모든 생명체에게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가장 큰 욕망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생존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생존'의 확대된 개념이 후손을 왕성하게 번식시켜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오랫동안 남겨놓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더 근본적이고 원초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을까? 이것이 가장 원초적인 것이다.

스스로가 인식하건, 인식하고 있지 않건간에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원초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맛난 음식을 찾고, 청결에 신경을 쓰고, 멋진 용모의 배우자를 찾고, 자식을 낳고, 오랫동안 이 상태를 여유롭고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며 살고 싶어 한다.

사람들이 모여살게 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생존과 번식이라는 원초적 욕망은, 2차적 사회적 욕망으로 파생되고 변조된다. 무리사회에서는 협동으로 사냥을 하며 지내야 하기 때문에, 같이 사냥하는 내 편에 대한 '협동심' 과 헌신' 이 중요해진다. 또한 한정된 사냥감을 놓고 경쟁하는 다른 무리에 대한 '적대감' 과 '승리'가 중요해진다. 같은 무리와 협동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무리를 배척하는 능력은 생존,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무리내에서의 협동심은 '사랑, 공감, 이타' 등의 선의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무리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무리내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 것이다. 그래야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로 오게 되면서 협동심의 대상은 가족으로, 혹은 자신으로 좁게 한정되어 버렸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미디어를 통해 점점 더 강화되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호화로운 집, 멋진 외모, 고급 차, 고급 옷, 명품 악세서리, 권위, 명예, 지적 능력, 여유,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돈. 이런 것들은 생존의 수준에서는 더 이상 필요없는 것들이지만,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한 욕망으로 인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SNS를 보면 우리는 '타인에게 인정받음, 선망의 대상 되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에 최적화되어 진화된 생명체

단세포 시절부터, 생명체는 원하는 것에 접근하기 위한 작용과 행동은 장려되고 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거나, 접근에 방해되는 작용이나 행동은 금지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금지되는 행동은 '통증을 유발하는 강렬한 전기자극'을 통해 불쾌함과 기분나쁨, 불편함으로 벌을 받았다. 장려되는 행동은 '쾌감을 유발하는 전기자극'을 통해 기쁨과 만족, 편안함으로 상을 받았다. 이러한 당근과 채찍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생명체는 적자생존의 원리로 번식에 성공하며 후손을 남겼고,
이런 선조의 DNA를 뭍려받은 후손들에게 이러한 성향은 점점 더 강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쾌와 쾌라는 채찍과 당근은 점점 더 정밀하게 고도화되었고, 다양한 상황에서 더 많은 빈도로 출현하게 되었다.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불쾌의 채찍을 더욱 강화시킨 생명체는, 어디선가 나를 노리는 적을 항상 경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성공적인 진화모델이 되었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타인과의 전쟁'에서 타인, 다른 무리들을 '일단' 적대시하는 행위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타인을 적대시하고 미워하고 짓밟고, 상대로부터 굴복을 받아내는 쾌감의 당근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의 반작용으로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분노'하고 '질투'와 '복수'를 꿈꾸는 불쾌의 채찍 역시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개선점을 찾아 고쳐나가는 것 또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실패했을때 '마음이 쓰라리게 하는 전기자극'이라는 채찍은, 다음번 시도에서 실패를 회피하게 하기 위한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반대로 성공했을 때 '마음이 짜릿하고 흥분되는 전기자극'의 당근은 계속해서 그 행위에 몰두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겉으로는 멋진 표현과 화려한 수사어를 갖다 붙이지만, 우리 삶은 이렇듯 '최대한 오래 생존' 이라는 지극히 원초적인 목적에 따라, '가슴이 쓰라린 것을 회피' 하고 '기분이 짜릿한 것을 찾아' 살아가게 되어 있다.

너무 최적화되어 괴로워지게 된 생명체

이렇듯 쾌와 불쾌, 기쁨과 슬픔, 편안함과 불편함 등의 감정은 생존을 연장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되고 강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도를 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한다. 쾌를 추구하고 불쾌를 회피하는 사고방법과 행동들이 그 자체의 정당성을 확보해 버리고 만 것이다. 세상은 전쟁터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가져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나와 세상을 명확히 경계 짓고, 나 이외의 타자를 적으로 여기고 미워하고 적대시하며 굴복과 존경을 받아내려는 행동. 원래 이러한 생각과 행동들은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생존에 유리하고 쾌감이라는 만족감을 유발하거나, 불쾌감이라는 괴로움이 해소될 때만 취해야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그러한 태도가 반복되다 보니 원래의 목적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것 자체가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적게 가졌을 경우, 불안과 두려움 불쾌감이 든다. 이러한 불쾌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인간은 더욱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이 우리의 진화방향이었다. 하지만 불쾌감의 전기자극은 우리에게 개선의 노력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우리를 과다하게 자극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더 비관적으로 보고 더 괴로운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 불안과 두려움 불쾌감의 전기자극은 이제 너무 세지고 괴로워서, 왠만한 노력으로는 도망갈 수가 없다. 즉 자신의 생존에 유리할 것이라고 고안된 이 메커니즘,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불안, 두려움, 불쾌함의 전기자극 자체가 문제가 된것이다. 이 메커니즘 자체가 도리어 생존에 불리하게 되어 버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문제제기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개선을 요구하는 이 전기자극은 너무나 강해졌다. 그래서 현재의 나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미워하고, 불만족스러워하며 학대하는 생각을 유발시킨다.
자신이 싫어지고, 자존감은 낮아지고, 미래는 불안하며, 현재는 불만과 불쾌감으로 가득찬 상태가 된다. 본래 생존에 유리하기 위하여 생성되었던 자신에 대한 개선 요구가 도를 넘어버린 것이다.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찾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두려움, 불안, 불만, 불만족, 불쾌감, 분노, 질투의 전기자극이 비상벨을 울려댄다. 그래서 분주하고 정신이 없다. 그렇게 비상벨에 놀라 허둥대며 쫓겨 도망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쾌감, 짜릿함, 도피, 회피의 전기자극이 쾌락의 종을 울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시도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고안되었던 도구들이 이제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 도구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불안의 비상벨이 울릴때마다 괴로워하고, 쾌락의 종을 울리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만 것이다. 비상벨이 울릴때 빨리 도망가는 것, 쾌락의 종을 자주 울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애초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까맣게 잃어버린 채 말이다.

뇌과학자들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뇌속의 편도체의 변연계의 작용체계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 메커니즘을 업설, 카르마론, 연기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이것을 음양오행설로 설명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설명한다. 이 메커니즘은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 부정적 측면이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 도 한다. 그래서 그것에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사탄이라고 부른다. 독일에서는 내 안의 돼지개라고 부른다. 서양의 어떤 책들은 이너차일드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중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옛날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는 성난늑대라고 부른다.

본능을 넘어선 이성적 활동

우리의 의식, 이성도 쾌락의 메커니즘을 따라 '지적 탐구'의 보상체계로 나타나게 된 현상이다.

자연에서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였다. 하지만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며 본능에 휩싸여 행동할 때, 생존에 더 위험한 순간들도 생겨난다. 즉 본능보다는, 논리적으로 따져 행동하는 것이, 더 생존에 유리한 경우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공포라는 본능에 주식을 투매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뇌는 도파민 체계를 이용하여, 본능과는 구별된 합리적 논리체계로 따져보는 것을 '쾌락'으로써 장려하게 되었다. 즉 자신의 행동이 진짜로 생존에 유리한 것인가를, 본능과는 떨어져서 따져보게 되는 능력이 장려된 것이다.이렇게 자신의 행동을 반추해보다 보니 자각이라는 능력이 생겼다. 본능을 따르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타인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자각된 인식이 이성이다.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의식, 오성, 신성, 불성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자각도, 변연계, 무의식, 카르마의 기반위에 생성되었기 때문에 그 기저는 공유되고 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이 부모보다 똑똑한 경우와 같다. 문제는 이 자식이 부모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느끼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모에게 본능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부모가 본능대로 하지 못하면서 겪게되는 아픔과 고통을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 전전두엽체계, 불성, 천사가 이 무의식, 변연계, 중생, 사탄을 원하는 대로 조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만족하고 더 이상 원하지 말자', '쓸데없이 괴로워 하지 말자' 라는 의식의 작용, 행위들이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명령한다고 부모가 그 말을 듣지 않듯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신은 덜 괴롭고,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가? '원하지 않기' 나 '괴롭지 않기' 모두 마음의 영역으로, 내가 손이나 발을 움직일 때처럼, 내 의도대로 되지는 않는다. 원인은 마음이 '불수의근'이라는 것이다.

이 '불수의근'이 '수의근'이 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즉 정신적 근육을 만들고, 그 근육을 내가 원할때 움직일 수 있으면 된다. 정신적 근육이란 뇌속의 신경세포를 말한다. 즉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뇌속의 신경패턴을 바꾸는 것이다.
이 신경패턴을 바꾸기 위해 위에서 실제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얻기위해 우리의 신체와 마음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그 원리와 동작기전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와 무아를 현대적 용어로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가능한 훈련방법을 순서대로 제시해 주셨다.

첫째는 뇌 신경안에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강한 각인을 새기지 말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은 어린학생에게 숙제를 주는 것과 비슷하다. 죽이지 말고, 욕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성추행하지 말고, 술먹지 말아라. 이걸 자꾸 어기면 신경패턴에 강력하게 각인된다. 그러면 어떤 생각도 각인된 그곳으로 빨려들어가기 쉽다.

둘째는 뇌패턴에 각인된대로 생겨나는 감정과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몸과 느낌, 생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훈련하다 보면, 내가 원할때 사로잡혀 있는 감정과 생각에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세번째는 이러한 원리를 잘 기억해서 끊임없이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때 내 자아의 정체성이 변한다. 잡념에 끄달리는 정체성에서, 잡념에서 자유로운 정체성으로 자아를 점차 옮겨가다 보면, 결국은 완전히 잡념과 번뇌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이렇게 뇌의 패턴이 바뀌어 버리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묵묵히 꾸준히 실천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