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학교후배인 회사의 어린동료가 나에게 묻는다. 선배님은 80억 생기면 어떻게 살거예요? 뭐하실 거예요?
잘 모르겠는데 너는 뭐하고 싶니?
일단 회사때려치고 강남에 아파트 하나 사고 여행 좀 다니고 조그만 빌딩사서 임대수익으로...
근데 80억 생긴 다음날, 말기암이 발견되서 3개월밖에 못산다면, 그때도 그렇게 할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다음부터 나하고 밥먹을 때 옆자리 앉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깨달음은 죽음을 미리 겪는 것이다.
몸무림치는 자아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 것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있다.
부정도 하고, 회피도 하고, 분노도 겪지만 결국 죽음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죽음이 다가워 정신이 혼미해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나오니 기억은 없지만, 의외로 평온한 느낌이었다는 체감이 있었다.
그랬던 사람의 병이 어느날 아침에 깨어보니 씻은듯이 낳았다. 그 사람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까?
깨달음은 아마 이와 같은 상황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고맙고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것이다. 하루하루가 선물이고 축복일 것이다. 죽음뒤의 두려움도 사라졌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소중할 것이다. 일분일초를 소중히 여기되 돈벌이와 욕망추구만을 위해 몸부 림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내일 죽는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3개월 이라면?
1년 남았다면?
10년 남았다면?
30년 남았다면?
우리는 모두 시한부 생명선고를 받았다.
삶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하다.
깨어나기 위해 주기적으로 의사의 오진을 받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시한부 생명임을 선고할 수 있다. 그것이 수행이다.
나는 오늘 저녁에 죽는다.
그러다 만에 하나 재수 좋으면
내일아침 깨어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내가 거기에 해당돠지 않는다는 생각은 뇌의 교묘한 회피작용이다.
이렇게 자아의 죽음을 수용해야, 고통따위 아무렇지 않게 된다.
전기자극 따위야 있건 없건 그냥 사는 것이다. 소풍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뭐 그것에 신경쓰랴. 절절매며 이 몸부림치는 자아를 굳이 그렇게 오래오래까지 끌고 가고 싶은가?
이 몸과 자아, 길거리 풀한포기와 차이나는게 무엇인가?
너무 염세적인가?
내가 언제나 그렇지는 못하지만 가끔 자아의 죽음을 수용할때가 있다.
그때 나는 태어나서 가장 나답게 생동감있게 살고 있다. 베이스가 무존재, 죽음이므로 결핍감은 없다. 언제나 심리적 흑자다.
자신이 깨달았는지 궁금한가?
오늘 저녁 죽어도 여한이 없는 자세로 자신의 행동이 바뀌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깨닫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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