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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생의 해탈

 파블로프는 벨을 울리며 개에게 먹이를 주었다. 몇번의 이 행동이 반복되면 개는 벨만 울려도 침을 흘린다. 이 과정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벨' 이라는 관념과 '먹이'라는 관념 사이에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벨'과 '먹이'는 뇌속에 동시에 나타났다. 처음에 그 관련성은 매우 적다. 동시에 뇌속에 나타난 다른 이미지, 개념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춥다', '남자', 등등 다른 개념이 동시에 출현했다면, 그것들과 관련성을 나눠가져야 한다. 벨, 먹이, 춥다, 남자 가 동시에 뇌속에 출현했다면 벨과 먹이의 관계는 0.33 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와 먹이의 관계도 0.33이라고 할 수 있다.뇌에는 벨과 먹이사이에 0.33의 강도를 가진 신경계가 생긴다. 먹이를 줄 때마다 벨을 울리면 이 신경계는 두꺼워진다. 가중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이다.  벨이라는 개념에는 많은 신경계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벨이 울리면, 뇌는 전기를 흘리고 가장 두꺼운 신경계를 따라 전기가 흘러 하위의 신경계에서 자동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먹이가 가장 두껍다면 먹고싶다 -> 침흘린다라는 자동 반응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때 개는, 벨을 울리면 청각에서 발생된 전기신호에 따라 유발된 침흘리는 기계라고 해도 될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인간의 뇌도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가령 맛있는 케잌을 보면 욕망과의 신경계가 활성화 된다. 욕망의 신경계는 만족시 쾌감이라는 신경계와 불만족시 결핍이라는 신경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먹고 쾌감을 느끼면 케익 -> 욕망 -> 쾌감의 신경계는 더 두꺼워진다. 그래서 다음에 케잌을 보면 더 욕망을 느낀다. 못먹으면 케잌 -> 욕망 -> 결핍 -> 고통의 신경계를 거치는데, 이 결핍은 다시 욕망의 신경계와 되먹임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핍되면 다시 욕망이 강화된다. 케잌은 한번 봤는데, 머리속에서 계속 케잌이 생각나며 욕망을 일으킨다. 그래서 케잌을 먹어서 만족될때까지 욕망과 결핍과 가슴시림의 고통의 순환은 계속된다. 이렇게 보면 이 때의 인간도, 케잌이라는 시각의 전기자극을 통해 유발된 고통을 느끼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 

 

 결핍은 통증의 전기신호를 통해 호르몬을 조정하는데.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하다, 가슴이 시리다. 뭔가 결핍감이 있다. 계속 배가 고프다. 갈증이 난다. 이런 느낌을 유발시킨다. 

 

물리적인 감각들을 통한 자극, 즉 형상, 소리, 향, 맛, 피부감각, 생각 등을 통해 유발되는게 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생각은 저장되어 있던 뇌속의 기억이 할성화 되어, 감각기관과 같은 전기자극과 같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모티브가 된다.  

 

욕망은 접근하고자 하는 욕망과 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케익 -> 접근의 욕망, 똥은 회피의 욕망이다.

 

심리적인 관념들도 동일한 Path를 밟는다. 자긍심은 접근의 욕망, 수치감은 회피의 욕망으로 관련되어 있다. 자긍심이 만족되면 그 욕망은 강화된다. 자긍심이 불만족 되면 결핍이 되고 다시 그것을 채우려는 욕망은 강해진다.

수치감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긍심이 만족되기 위하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한다. 사회적 인간은 모두 그렇게 키워졌다.

그래서 타인이 나에게 혐오스런 표정을 짓거나 안좋은 소리를 하면,  이 자긍심, 수치심 신경계가 활성화된다. 이 신경계는 그 타인이 나에게 웃으며 나를 인정해 주는 시그널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 결핍의 회로를 돌리며 활성화 되게 된다. 

 

이 루프를 돌릴수록 수치심의 신경계는 강화되고, 남의 표정과 평가에 점점 더 민감해지게 된다.

나중에는 그들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요구한다고 착각까지 한다. 대표적인 착각이 '돈이 많아야 인정을 받는다'는 착각이다. 나를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면 '돈이 없으니 무시를 받는군' 이라고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타인의 인정 = 돈이라는 관계의 신경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래서 인생이 고통인 것이다. 열심히 노력할 수록 괴로운 이유다. 어차피 세상의 타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그 타인 모두의 작은 불만까지도 들어 줄수는 없다. 아니 그들은 요구하지도 않는 자신이 창조한 대단히 많은 착각의 요구는 들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인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살고 있다. 남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 혹은 자신이 창조한 착각의 '고정관념'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힘들다고 요구가 너무 많아 괴롭다고 남들을 욕하고 있다. 그 남들이 모인게 세상이므로 세상도 욕한다.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냐고. 이것이 인드라망에 걸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 때의 인간은, '타인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창조한 '착각의 고정관념'의 전기자극에 의해 유발된, 발버둥치며 노력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기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괴롭지 않을려면 이 뇌의 신경망을 고쳐야 한다. 어떻게 이 뇌의 신경망을 개조할 것인가? 당장 뇌의 뚜껑을 딸 수는 없으므로 다른 관계의 신경계를 두껍게 강화할 수밖에 없다. 

가령 새로운 개념을 하나 생성하자.  '이것은 단지 형성된 개념, 전기신호일 뿐'이라는 '공' 이라는 개념을 생성했다 치자. 

어떤 감각의 자극으로부터 유발된 개념 또는 생각에 의해 유발된 개념이 생겨도 '이것은 공'이다 라고 연결시켜 보는 것이다. 이 관계를 강화시켜 보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모든 개념의 전기신호는 욕망으로 강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이 '공'이라는 관계를 시도 때도 없이 하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미친놈처럼, '이것도 공이다' '저것도 공이다' 하고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때쯤 되면 거의 저절로 욕망의 신경다발과 이 공의 신경다발이 각축을 벌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공이 더 강화되고 두꺼워지는 순간이 있다. 이 때가 깨달은 시점이다. 이때도 욕망은 일어나지만 공이라는 다발이 더 학습이 빠르기 때문에 가중치는 더 커지고,  욕망의 다발의 가중치는 작아지게 된다.

욕망다발의 두께는 점차 얇아지고 가증치는 작아지며 소멸되게 된다. 이 시점이 해탈한 시점이다.  

 

'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무' 라고도 할 수 있으며 사실은 아무말이나 갖다 붙여도 된다. 욕망의 다발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전기신호일뿐' 이라고 갖다 붙인다. 일상생활 할때도 할 수 있다.

 

명상할 때는 어떤 감각, 느낌, 생각, 감정이 있는지 나의 마음속을 살피며, 내 안에서 연기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흘러가는지를 음미한다.

가끔은 신레몬을 생각해 침을 흘려보는 것도 좋다. 아 역시 나는 '개'구나. '침흘리는 기계'구나 느껴본다. 상사를 생각하며 심장의 맥박수, 몸의 온도와 분노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돈을 생각하며 나의 가난과 가슴시림, 결핍감, 수치심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그것을 역역히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전기신호일 뿐'이라고 하면 나의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다시 느껴본다. 고통의 강도가 줄었다면 나의 뇌에는 '공'의 신경다발이 강화된 것이다. 성공이다. 몸은 변했다. 뇌의 신경구조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해탈에 다가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이렇게 하기 힘들다. 하지만 문득문득 '공', '공' 이라고 속으로 생각날 때마나 읊조려라. 나는 20분마다 타이머를 정해놓고 혼자서 '공', '공' 이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