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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의 의도

유전자가 자신의 번성을 위한 숙주로서, 생명체를 활용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아무리 이리저리 논리를 굴려가 봐도 그게 맞는 것 같다. 결론이 그렇게 된다.
세상을 아는 과정이 그렇다. 가정을 하고 현상을 살피고, 그에 따른 행동을 했을때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면 가정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 뇌와 몸은 유전자의 대리인이 된 자아라는 개념에 종속되어 자아가 쏘아대는 뇌의 전기자극과 호르몬에 의해 조정되는 좀비다. 이것이 가정이다.

유전자의 명령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번성해라. 그러기 위해, 욕망하라. 서로 편을 갈라 경쟁하고, 더욱 개체화되어 경쟁과 욕망을 극대화시켜라.

우리 인간은 이 명령에 따라, 전기자극의 짜릿함과 고통에 의해, 자본주의, 핵가족화, 개인화의 과정을 거쳐 욕망을 키워가며 헐떡거리며 달려가고 있다. 늙음과 죽음이라는 것은 가급적 눈에 안보이게 되었다. 욕망을 약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랑은 숨고 에로스적 욕망만이 강조된다. 먹는 것에 목숨걸게 만든다.

노예해방을 위해서는 레지스탕스 활동이 필요하다.

죽음을 직시한다. 오늘이 내인생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할것인가? 유전자가, 자본주의가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죽음을 호출해서 바라본다. 나는 오늘 죽는다. 그런데도 무엇을 갖기 위해 허덕일 것인가? 이러면 욕망이 싹 사라진다. 유전자가 원하지 않는 일이다.

내가 기분이 좋아야만 행복하다는 고정관념을 깬다.
아이가 기분이 나빠도 내 기분이 좋으면 되는가? 아내가 기분이 나빠 불행해도 내 기분만 좋고 나만 행복하면 되는가?
물론 아이도 좋고 나도 좋고 서로 행복하면 좋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 먼저 아이가 기분좋기를 바란다. 먼저 아내가 기분좋기를 바란다. 주변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가 장기적으로 기분좋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 내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할까?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다. 당신이 기분 좋아서 행복하면, 나의 기분따위는 사실 상관없다. 나는 당신이 행복해서 행복하다. 이러면 욕망이 줄어든다. 유전자가, 자본주의가 바라지 않는 모습이다.

겸손해진다. 나는 바보다. 나의 아이큐는 80도 안되는 어린아이이다. 내 뇌안의 호르몬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의 아이큐는 2만이다. 내 안의 호르몬 변화를 나보다 더 정확히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상대의 무의식적 표정변화에 민감하다. 내 안의 생각은 다 들킨다. 내 안의 은밀한 욕망울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나만 모른다. 내 눈은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바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잘난척 할 수가 없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에서 바라지 않는 모습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모른채, 자신을 부풀려 바람을 잔뜩 불어넣은 개구리처럼, SNS에 경쟁적으로 자랑을 해대며 사는 것이 유전자가 바라는 것이다.

이 세가지가 내가 주로 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이다. 명상의 주제다.

나는 오늘 저녁 죽는다.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인연을 수용하고 지금 눈앞의 사람의 행복을 빌어준다. 그가 기분이 좋기를 바란다. 그와의 만남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죽음에 대한 수용, 사랑, 겸손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내일 아침 운이 좋으면 다시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