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드의 이드, 에고, 초자아를 라캉은 욕구, 욕망, 요구에 대입시킨다.
인간에게게는 생존과 번식의 동물적 욕구가 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동물들은 욕구를 해소할 대상이 눈에 띄면, 욕구를 만족시키는 조건 반사적 행동을 하게된다. 물론 이 과정에 위험을 줄이기 위해 두려움을 주는 프로세스가 개입을 한다. 그래서 욕구의 충족 행동과, 위험을 비교하여 행동이 자동으로 결정된다. 즉 위험이 적다면 욕구를 충족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 과정에 개체의 선택은 없다.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에 있어 인간은 동물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바로 사회적 금기이다. 욕구충족행위가 개체의 안위 기준내에서만 정해지던 것들이, 사회전체의 안위 기준으로 확대되어 다시 개인에게 부여된 의무가 이 금기이다. 이것은 양심으로, 도덕으로, 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초자아라고 불렀다.
사회적 의무가 개체화되어 표현된 것이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에고의 무절제한 욕구충족을 사회적 금기로써 금지한다. 이러한 금기로 인해 개체 욕구의 완전한 충족 '요구' 에 대한 미실현된 부분이 발생하게 된다. 라캉이 정의한 욕망은 바로 미실현된 욕구의 충족 '요구'이다. 그리고 이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것, 형성된 것이 자아이다.
만약 아기때 욕구 추구에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는다면 금기도 없고 욕망도 없어져야 한다. 그래서 자아도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회에서 살려면 언어를 배워야 하고, 언어속에는 대상을 지칭하는 명사속에 이미 욕망과 금기의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욕망과 금기의 경험이 없는 아기는 단어와 그 의미를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욕구에 대한 제제를 받지 못하게 되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진다고 추론하고 예측할 것이다. 그것이 굳으면 과대 망상이 된다.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한다. 조현병이다.
우리는 아이가 이 조현병에 걸리지 않도록 아이의 사회화를 위하여 처절히 노력한다.
그래서 타인의 욕망을 알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신경증 환자가 탄생된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년전에 꿰뚫어보셨다.
인간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기위해서는 공동체의 기준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물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받아들이면 욕구불만이 되어 괴롭다. 그렇다고 동물로서 살자니 인간계에 태어나서 사회화 교육을 받은 이상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의 삶은 숙명적으로 고통스럽다. 이것이 일체개고의 의미다.
사회의 금기를 받아들인 이상, '동물적 욕구의 결핍'은 주체화된 사회적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변조되어 나타난다. 이상과 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회적 욕망 말이다. '이상적인 상태' 란 실제로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이상적 상태를 설정하고 현실과의 갭을 신체적 고통으로 느끼고, 우리의 뇌는 그것을 괴로움의 감정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고통은 더욱 신체에 각인된다. 신체에 각인된 고통의 Gain 은 감정을 느낄때마다 더 강해진다. 그래서 개체는 더욱 더 그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괴로움의 감정에 머물면서 고통의 Gain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 타자의 욕망과 자아는 떼어놓을 수가 없다. 타자의 욕망은 원래 개체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서 (동물적 사고로부터) 분리되어 '형성된' 주체의 개념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자아를 착각이라 하셨다. 제법무아는 이것을 말한다.
철학자들이 언어를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언어에서 모든 사고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단어가 없다면 내가 사고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이렇듯 언어는 동물과 인간을 차이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인간은 사회적 욕망과 기준을 언어를 통해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언어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바로 '대충' 얼버무린다는 것이다. 세상만물은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 우주는 변화되고 있다'는 한 문장밖에 없울 것이다. 변화되는 모든 현상을 포함하는 단어, 개념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시공간을 분리해서 대상을 단어로 분리한다. 그러다 보니 단어라는 것 자체가 마치 변하지 않는 특정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이 사실을 모르고 언어를 배우다는 것은, 나뉘지지 않는 대상을 강제로 나눠서 양자화한 가상세계를 구축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만물이 지금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변한다는 것은 지식으로는 알지만, 몸은 계속된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몸의 착각을 정확하게 아셨다. 그래서 제행무상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나눠지지 않는 세계가 상호 원인과 결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연기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주만물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처럼 무상을 알고는 있지만, 못 느끼는 것의 가장 직접적인 예가 죽음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현실로 느끼지는 못한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죽음의 느낌을 강조하셨다. 네 몸뚱아리는 썩어갈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부정관 수행을 강조한 것이다.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8정도이며, 계정혜이며, 중도의 길이다.
철학, 심리학, 뇌과학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고오타마 싯타르타 부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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