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할 수 없는 정신적 영역은, 우리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표현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무의식라고 하면 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의식만 없고 모든것이 있는 상태부터, 의식은 물론 다른 아무것도 없는 상태까지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다. 임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내 나름으로는 의식이 생긴 곳, 의식이전, 의식의 부모 정도라고 개념을 추측해 본다.
이 무의식의 가장 기저에는 본능의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안전하고 싶다, 무엇이 먹고싶다, 성적충동을 느낀다, 등등의 욕구 말이다.
또한 무의식의 표층에는 융이 말한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의 영역이 있다.
사회적 욕망에 의해 형성된 멋진 자아를 위해, 억눌려진 본능의 에너지가 뭉쳐서 형성된 비뚤어진 자아이다.
우리는 의식영역에서, 사회적으로 멋지고 사교적이고 인정받기 위해, 훌륭한 인격의 가면을 쓴다.
그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다보면, 나는 원래 그렇게 훌륭하고 우월하다고 의식 자신도 속는다.
하지만 이렇게 의식이 자신을 속일때
억압된 본능의 충동 에너지는, 불안하고, 형편없고, 외토리에, 게으르고,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쓰레기같은 수치심으로 가득찬 열등감의 자아로 의식너머에 형성된다.
이 열등감의 자아를 우리는 무의식의 자아, 이너차일드, 울고있는 그림자, 내안의 늑대개, 악마, 사탄, 카르마라고 부른다.
이 녀석은 몸이 약해지거나, 의식이 약간이라도 취약해지면 스멀스멀 기어나와
떼를 쓰고 악을 쓰며 활동을 시작한다.
이 때는 비상상태이므로, 이 녀석을 안심시키고 수용해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 너도 존재하게 된 이유가 있어. 내가 너무 가면을 많이 쓰고 너를 돌보지 않았어.
너는 그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억누르며 힘들게 지내고 있었구나.
네가 열받을 수 있는 상황이야. 너를 이해해. 인정해. 앞으로 가면을 조금 덜 써서 너를 덜 힘들게 할께'
이렇게 아이를 조금 인정해주면, 떼쓰고 악쓰는 횟수 및 강도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어느정도 진정이 되면 너무 이놈에게 신경 안쓰고 살아도 된다.
하지만 이 무의식의 자아를 언제까지 달래주며 살수는 없다.
실제로 의식이 쓰고 있는 가면을 어느 정도는 벗어야 한다.
하지만 이 때는 또 의식의 자아가 난리부르스를 춘다.
사회적 욕망을 버린다는 것에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
'삶은 위험해,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해, 돈을 많이 벌어야 안전해
인정받지 못하면 사회적 매장이야. 그건 죽는것과 똑같아'
이 때는 뒤로 빠져야 한다. 이 의식의 자아라는 놈에 집중하면, 또 내안의 그림자가 난리를 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의식과 무의식의 자아들, 이것들을 그저 바라봐야 한다.
사실 의식이건 무의식이건 자아이건, 에고이건, 그것들이 찧고 까불고 뭔 짓을 해도 무슨 상관인가?
그것들은 그렇게 생겨나서 그렇게 악을 쓰며 잠시 존재하다가, 또 바뀌어 갈 것들이다.
그 사실을 알게되면 한발 물러서서 그냥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물끄러미 보다가 혼잣말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것이 여여부동이다.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