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아이라고도 불리는 중생은 충동이 바로 해소되지 않는 현실을 고통으로 인식한다.
이러면 많은 순간이 고통이 된다.
왜냐? 인간의 몸은 항상 충동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음식을 보면 먹어야 하고 괴로운 것은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도망가든지 파괴하든지 말이다.
충동을 즉각적으로 해소시키면 즐거움, 해소시키지 못하면 괴로움이라고 우리는 인식한다. 그러한 인식이 습관이.되면 점차 몸의 감정체계와 연계되어 몸의 상태를 바꾸어 실제적 쾌락과 고통의 감각으로 바뀐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고통은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다 . 쾌적한 느낌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이 인식의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우리는 다시 정신적 신체적 괴로움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차를 사려고 마음먹으면,.그 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그 차로 세상은 넘쳐난다는 것을 알게된다. 내가 노란색을 찾겠다고 마음 먹으면 세상에 노란색이그토록 많다는 것을 알게된다.
세상이 바뀐것인가? 나의 주의 집중 대상이 바뀐것인가?
생각은 마음의 선언, 마움먹기와 같다.
아, 나는 태어나기도 박복하게 태어나고, 도와주는 이도 없고, 재능도 없다. 주변에는 못된 사람만 들끓는다. 되는 일도 없다. 그러니 나는 불행하다. 아무리 마음공부를 한다해도, 정신승리일 뿐 이 현실이 바뀌겠는가?
마음공부 하는 곳에 가보면 이런 류의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나레이션이, 자신에 대한 의미부여임을 모르고 있다.
의미부여는 자신이 어떤 정보를 좀 더 많이 수집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이 된다.
이 결정에 따라 세상과 자신에 대한 증거가.수집되고,. 세상과 자신의 이미지는 스스로에 의해 창조된다.
생각은 자기선언이다.
나는 태어난 것을 박복하다고 인식하기로 선언한다.
나를 도와주는 이는 없다는 극단적 최악의 가정을 내 케이스로 믿기로 선언한다.
나는 게으르고 재능이 없다고 믿을 것을 선언한다.
못된사람만 주변에 있고,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을 것임을 선언한다.
나는 절대적으로 불행하다고 인식할 것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은 나의 신체의 감각기관들을 변화시킨다. 감각기관의 주의력이 온통 그러한 시그널과 증거들을 수집하는데 더 예민하도록 바뀌는 것이다.
증거가 넘쳐나니 이것은 점점 사실이 된다. 이 사실들에 근거하여 살아가니 나의 몸과 정신은 정말로 그렇게 된다.
사소한 부정적 인식의 습관들이 쌓여, 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은 선언과 사명이 되어 '생각'한대로 '나'는 반드시 실현된다.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인식하자고 마음먹는다고 해도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주의력은 긍정적 시그널보다는 부정적 시그널에 더 예민하도록 진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내가 되고자 할 때보다 좀 더 많은 의도를 갖고 긍정적인 시그널과 증거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이것이 인간세상의 시크릿이다.
이렇게 긍정적이 되면 어떤 일을 할때 극복해야 할 부정적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에 일 진행이 수월하게 되고 점차 자신이 생각한 것을 달성하기 쉽게 된다.
좀 더 근본적인 방법도 있다.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자신을 그 시점에서 알아차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생각을 중지하는 것이다. 외부로 향한 집중과 주의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게 아니다. 아예 중지시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주의를 빼앗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도리어 나를 수고스럽게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서 주의를 회수하여 내 자신의 안쪽을 지켜보고 있을 때 도리어 모든 수고스러움이 사라지고 잠시나마 평온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습관적인 외부를 향한 주의에 대한 집착은 사라진다.
외부의 번잡함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 내면의 고요함에 머문다.
이제 외부세계는 수동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 외부 세계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없다. 그냥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외부세계에는 나도 포함된다. 나조차도 그저 하나의 풍경일 뿐이며 긍정과 부정의 대상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자신의 안위와, 현재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도 초연해질 수 있다. 이럴때 현재 하고 있는 행위에 더 집중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집중력을 얻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부가적으로 생긴 효과일 뿐이다.
이것을 목표로 삼는 순간, 나는 또 나라는 외부세계에 대해, 주의를 빼앗기고 의도적 데이타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가늠하고 좀 더 잘하는 방법을 찾게된다. 다시 선호가 생기고 만족과 불만족, 쾌적함과 불쾌함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 기대하는 바를 놓고 행위를 한다면 이미 고통의 수레바퀴는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내 안에 집중하고 있거나, 내 눈앞의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라.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해라. 그러면 괴로움은 발생하기 어렵다.
인식력의 존재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껴라.
나는 어떤 것을 인식하고 행위로 옮길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쪽이든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집착하지 않고 하는 순수한 운동과 먹이활동 그것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인식력에 대한 집착조차 엷어지게 된다.
인식력의 없다면 수고스러움이 덜 할것이다.
인식력이 있다면 그때 그때 뭔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쪽도 행복하다.
이것은 해탈, 해방의 시크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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