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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분별, 후회 불안 괴로움 의 본질

사리분별은 사물의 이치를 분간하고 구별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사'와 '리'가 있다. 사는 드러나있는 것이고 리는 안쪽의 본질이다. 그 본질을 인식하는 힘이다. 우리가 이성적,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 편의 나쁨과 상대편의 좋음을 구분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있는 그대로 , 내로남불하지 않고, 현상의 근본적 동기를 있는 그대로 살피는 능력이다.

'깨어있음'도 이 사리분별의 상태이다. 현상만을 보고 이리뛰고 저리뛰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일으킨 본질을 '깨어서' 차분히 바라보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깨어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본질을 보기위해서는 면밀하고 객관적인 관찰이 중요하다.

투자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주식을 산다. 코인을 산다. 부동산을 산다.
떨어지면 후회하고 자책한다. 그리고 더 떨어질까봐 불안해 한다.
그러다 조금 오르면 기분이 좋아서 행복해 한다.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해서, 고르고 골라 주식을 샀건만, 주가의 방향에 따라 내 마음은 요동치고 흔들리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반복하며 나아간다.
더 노력해서 열심히 유튜브도 보고 책도 사서 읽고, 자신을 리뷰하고 오답노트도 써가면서 투자를 해나간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인투자가들은 공포의 무게에 억눌려 저가에 팔고, 욕심을 조절하지 못하고 고가에 사며 실패를 반복한다.

왜 그럴까?기술적 관점보다 내 마음을 컨트롤 하는 측면에서  나눠서 따져보자.

결과가 조금 좋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의 결정에 대하여 후회하고 괴로워 하며 자책하며 절망한다.
잘못된 결정을 해 놓고 후회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후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잘 보면, 바꿀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

또 우리는 불안에 휩싸여 괴로워 한다.
불확실한 상황을 앞에 두고, 불안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는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불안의 1차적 본질은 무엇인가?
잘 보면, 미래를 완벽하게 통제하겠다는 생각과 그것에 집착하는 자아의 욕망이 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지면 안된다는 강한 생각이 있다.


주가가 오르면 기분이 좋아져 행복해 한다.
주가가 오른 것이 문제의 본질인가? 행복감의 본질은 무엇인가?
잘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져야 한다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내 기분이 좋아져야 행복하다는 생각이 있다.

괴로움은 생각과 현실이 다를때 나타나는 통증이다.
세상은 내가 모두 알 수 있고,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 뇌에서는 통증의 감각이 일어난다.
생각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것은 나만의 고정관념, 내가 인식한 나만의 세계이다.

나의 고정관념이 현실과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짧은 시간 우리는 쾌감을 느끼고, 일치하는 않는 많은 시간에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괴로운 시간이 보통은 더 많다.
만약 자신의 세상에 대한 통제능력, 이해능력은 작은데, 세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클 때 고통의 감각은 더 크고 길다.

괴로움에 대한 본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의 감각을 벗어나고자 통제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열심히, 아주 매우 열심히 노력한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고통은 잠시 줄어드는 듯하나 다시 또 커진다. 통제능력을 개발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의 본질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그렇다. 노력이 부족하다' 라는 대답을 한다. 그래서 더 노력을 하게된다. 자기 계발서를 읽고 밤잠을 안자고 노력하지만 고통은 끝이 나지 않는다. 욕구와 현실간의 결핍감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결핍감은 생긴 이유와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에 고통을 만들고, 우리의 몸과 맘을 그것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쇼핑을 하고 술을 먹고 쾌락을 찾아 헤메인다. 친구를 만나 부조리한 세상 탓을 하고, 상호 인정을 하며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핍감은 더 커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핍감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부족을 확인한 자아는 결국 자신도 미워한다.

다짐과 노력과 쾌락과 위로를 반복해도, 채워지지 않는 자 신의 결핍감과 고통과 무능에 대한 이해가 안되는 사람들은그렇게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운명을 찾고, 신을 찾는다.

대부분 그렇게 살아간다. 더 알기를 포기한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고 나는 무능하다. 나를 알아주는 이도 없고 세상사는 재미도 없다. 이런 생각도 복잡하고 괴롭다. 술이나 먹고 게임이나 하자라는 사람이 나온다.
괴롭지만 죽을 때까지 가보자 하면서, 전전긍긍 노력하며 자신의 통제능력을 키우는 사람도 나온다. 이런 사람들은 그나마 족적을 남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많이 괴롭다. 암에 걸릴 수도 있다. 자존감이 낮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사람들은,
한번 더 깨어나, 욕망의 관성적 특징을 인식한다. '욕망은 손에 넣은 것 이상을 욕망한다.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문제다.'그래서 적절하게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수는 적지만 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욕심을 부린다. 자신의 세상에 대한 인지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세상의 변화를 살피며 도가 넘는 욕심을 절제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인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 수준의 괴로움의 종식에 대한 본질이다.

이렇게 살아가면 안정되고 적절하게 행복한 느낌을 가지며 살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멈추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일단 여기까지는 고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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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아의식이 강하고 욕심이 많아서, 아주 근본적인 고통, 상실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까지 해결하고 싶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한발 더 힘들게 나아가야만 한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삐딱하게 길을 잘못든다. 욕망을 아예 죽여버리겠다고 욕심을 부린다. 자신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욕망을 죽일 수 있다고 또 욕심을 부린다. 그러면서 본인은 아무 욕심도 없다고 착각한다.
아예 모든 욕망을 끊으려 한다. 완전한 금욕을 한다. 그러면 잠시 평화가 찾아오고 일상적 행복감보다 더한 깊은 평온감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 고통은 다시 이전보다 더 커진다.

자신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는 욕심을, 자신 내부를 바꿀려는 다른 욕심으로 대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무모한 시도가 된다. 겸손하지 않고 남을 가르치려 들고 작은 성공을 떠벌린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욕망을 버릴 수도 있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떠벌려놨기 때문에
괴롭지만 죽을 때까지 가보자 하면서, 전전긍긍 노력하며 자신의 욕망을 버리기 위해 더 노력한다.

일시적으로 욕망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 잠시 억눌려진 것이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언제라도 다시 튀어나온다. 이제와서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할 수도 없다. 적절히 욕망을 인정하며 살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더.
그래서 항상 불안하다. 자신을 쇄뇌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자신이 자신을 속이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한다. 그래도 틈만 나면 제자리도 되돌아 온다. 그러면 더 자신을 쇄뇌시키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팽개치고 쇄뇌된 자신안으로 도망치려 한다. 남들을 경멸한다. 이것은 더 최악이다 .

자아는 스스로를 속인다. 잠시 모든 욕망이 없는 도사 흉내나 하나님을 신심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완전히 죽였다는 독실한 신자로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조절할려고 실제로는 노력하지 않고, 욕망을 조절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인 것이다.
욕망이 조절되지 않으니 본인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지고, 결핍감이 생기고 남에게라도 인정받기 위한 더 노력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더 큰 결핍감만 남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 방법은 더 나쁘다.
이것이 어설픈 재가 수행자의 본질이다. 욕심을 버리고 착하게 살겠다는 마음이 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수행자일수록 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 상태에서 계속 고집을 부리면 본인의 본래 모습을 부정하고 쇄뇌한 자신을 믿어버려 과대망상증이나 완전한 자기비하의 조현병으로 발전한다. 자신을 바꾸려는 욕망도 결국 결과를 빨리 얻고 싶어하는 욕심, 그것이 정말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성은 더 크다.

이것이 어설픈 수행자의 본질이다.

능력에 맞게 욕심을 부리며, 세상을 그러려니 인정하고 세상의 변화를 살피며 도가 넘는 욕심을 절제한다. 적절한 수준의 욕망의 실현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그것에 대한 대답이 예스라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죽음과 상실에 대한 공포까지도 뛰어넘고 싶은 분이 있었다.
부처님이다. 이것도 하나의 욕망인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을 통해서는 이것을 이룰 수가 없다.
욕망은 상실과 결핍감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 '관찰'과,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이치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 관찰이 '알아차림 명상'이고, 욕망과 집착이 괴로움의 원인임을 끊임없이 지켜보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이것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해탈하는 위빠사나의 궁극적인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