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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할 때

'그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해'
'그 사람 때문에 불편한 내 마음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비슷해 보이지만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나요?
지금 나의 상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음 행동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될 수 있어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싫어서 마음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보통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단정짓습니다.
즉 '그 사람의 어떠어떠한 점 때문에 내 마음이 불편하다'라고 현재의 상태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석을 하고 나면 불편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 사람이 특정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그 사람을 내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하는것이지요.
즉 내가 그 사람을 조종하거나, 피하거나,  공격해서 쫓아버리는 것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한편 '그 사람을 싫어하는 내 불편한 마음상태가 싫어'라고 현재의 상태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불편한 마음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솔루션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불편한 마음상태를 갖는 '나의 특성'에 집중해서
내 내면을 고치려는 방향으로 솔루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특정행동 혹은 그 사람 자체는 내 불편한 마음의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사라지더라도 불편한 마음상태는 또 나타납니다.
즉 그 사람은 내 불편한 마음의 표면적 원인이고 근본적 원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의 내부에서 근본적으로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찾다보면, 이 불편한 마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때가 되면 불편해 지는 내 마음에 하필이면 포착된 것이 '그 사람의 특정 행동' 일 수 있습니다.
가령 몸이 아프면 어떤 사람이 말 걸어오는 것도 싫고 꼴도 보기 싫고 모든 것이 귀챦고 싫은 경우가 있지요.
확장해서 보면 그런 상태와 유사할 수 있습니다.
내 '인내의 창'이 좁은 상태에서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불편한 마음이 더 많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내면을 살피는 습관을 갖게 되면, 불편한 마음상태를 야기하는 다양한 자잘한 스토리들에 덜 구애받게 됩니다.
불편한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게 되지요.
탈출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불편한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게 아니라고 불편한 마음의 숙명성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살다 보면 문득 '걱정이 끝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자연스럽게 이러한 숙명성을 인지하는 순간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자잘한 스토리들이 우리 삶의 모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자잘한 스토리, 생각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집착하는가? 가 나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을 너무 단단하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