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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2,부처님이 본 세상

부처님이 본 세상의 모습은

 

78억개의 새장속에서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며 괴로워하는 다람쥐의 모습이었다.
78억개의 고치속에서 열심히 방을 꾸미며 흐뭇해하는 누에고치의 모습이었다.
드럼통을 뒤집어쓰고  무한질주하며 서로에게 치받혀 아프다고 하면서도 달리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78억명의 달리기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욕망의 쳇바퀴 돌리는 것을 멈추면 너희가 피곤하지 않다'고 알려주셨다.

멈추고 나서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건 멈추어 보면 알 수 있다.  저절로 할 일은 생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멈추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만약 멈추면 심심해서 죽을것 같은 권태가 찾아올것이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멈추어 보지 못했을 것 같다. 상상만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

심심하면 쳇바퀴를 다시 돌리되 건강삼아 돌린다. 체력이 남아서 주체가 안되고 더 심심하면 옆집 쳇바퀴도 같이 돌려준다.

드럼통을 벗었으니 사람들끼리 치고박는 모습을 구경한다. 건강삼아 드럼통 피해가며 달리기를 한다. 눈이 보이므로  드럼통끼리 덜 부딪히도록 도와줄수도 있다.

플라모델 조립하듯이 재미삼아 고치속 세상을 만들어본다. 옆집 누에가 너무 못만들면 본드도 발라주고 고쳐주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일단 재미있다. 그리고 릴렉스한 상태에서 놀듯이 뭘해도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없고  일의 성과도 잘 나오는 부수적 효과까지 있다.

우리는 매트릭스안에서 사육당하는 인간들과 같다. 파란약을 먹을지 빨간약을 먹을지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자유 의지다.  나머지는 모두 전기자극이다.

이 글을 쓰는것도 전기자극의 발버둥 촉진에 의한 결과이다.
하지만 앞의 전기자극과는 약간 다르다. 다른 전기자극들을 줄여주기 때문에 전체 총 전기자극은 줄어들고 고통은 줄어든다. 이것을 계속해나가라. 어느순간에는 이 새로운  전기자극이 나의 뇌속에 각인되어 이전의 신경다발을 완전히 대체한다.  의지가 뇌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울 뜻한다. 스스로 전기자극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행복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복음이다. 구원이다.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앉아서 내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들어 나를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한 기적의 마술이다.

이때가 되면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새로운 전기자극이 고통의 전기자극보다 점점 더 강하게 스스로 성장한다. 기존의 전기자극은 여전히 가슴시림을 유발시키지만 그것을 두번째 화살을 맞는 것처럼, 고통으로까지 끌고가지 않는다. 이때의 정체성이 깨달은 사람이다.

이 글을 쓰는것도 결핍감 기반위에 피어난 곰팡이의 하나의 허세일 수 있다. 하지만 한가지는 명확하다. 나는  뇌속의 새로운 신경다발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업, 착한일이다. 고로 지금 나는 하나의 착한일을 했다. 그 착한일로 인해 나의 고통의 전기자극은 조금 줄어들었다.
또한 이 글로 인해 누군가의 고통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도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자리이타의 보살행이다.
만약 나에게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이 이런 행동을 흉내내어 자리이타행을 또 하면 세상 고통의 총량은 조금 더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선한 영향력이 퍼져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하게 된다면 그곳이 바로 지상낙원이다.
하나남의 천국이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세계에 그런것은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나의 고통을 줄이는 것에 만족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