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세상은 도대체 왜 이모양이지? 왜 이렇게 살기 힘든거야? 내 주변에는 또라이 같고 싸이코패스 같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거야? 하는 짓은 한심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못된 것들이 너무 많아.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너무 힘들어.
A : 세상탓이 아니다. 그들 탓이 아니다.
Q : 그래? 그럼 내탓인가? 아무리 노력해도 힘든 것을 보니 내가 무능한가봐. 아아 나는 병신같은 놈..나는 살 가치도 없어.
A : 너 탓이 아니다.
Q : 그럼 누구 탓이야? 누군가는 잘못했으니까 이렇게 괴로운 거 아냐?
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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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잘못되었다.
누구 탓이라는 것은 없다. 심지어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행동하는 '누구'라는 것조차도 없다.
오직 누구, 누구탓이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기억영역이 있을 뿐이다.
그 기억영역이 어떤 계기로 자극되면 느낌, 감정, 생각, 말, 행위라는 현상이 일어날 뿐이다.
'나라는 것은 없다. 현상만이 있다' 라는 말을 줄여 무아라고 말한다.
현재의 괴로움이라는 현상을 낳게 한 과거의 행위가 있었다.
나름 잘한다고 했던 그 행위들. 그것들이 허상의 기억을 강화한다.
나라는 현상은 단지 과거 행위의 상속자다. 부분집합이다.
이것을 줄여서 업, 카르마라고 이름지어 부른다.
과거의 무의식적 행위들이 현재의 괴로움을 낳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피하기 위한 지금의 무의식적 행위 역시 미래의 괴로움을 낳을 것이다.
행위는 관념과 감정의 기억을 공진시키며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서로를 지탱하며 쇄교되어 나아간다.
이것이 윤회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상태가 무지라고 칭하는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은채로,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하며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리저리 부딪히며, 상대를 향해 소리친다.
'조심하라구..이리 함부로 와서 부딪히면 어떡해? 아프쟎아'
그러다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다.
'아아..힘들다. 멈추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삶은 너무 고되다. 도대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이 중생이다. 그들은 힘들때만 묻는다.
Q 도대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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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잘못되었다.
삶이란 없다. 삶이라 이름붙인 관념만이 있다.
삶이 없는데 삶의 의미야 오죽하랴.
그것은 마치 새벽안개같고 아침이슬같고 구름과도 같고 파도와도 같다.
조건이 맞으면 형성되는 것이다.
인연이 될때 꾸게 되는 꿈과 같다.
이것이 연기다.
조건이 사라지면 해체된다.
이것이 무상이다.
다만 이뿐이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연기와 무상이 너무 부당하다고,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연기와 무상을 시비하는 생각이 괴로움의 원인이며,
왜 이렇게 힘드냐며 호들갑을 떠는 생각은 괴로움의 피해자다.
자신이 파놓은 무덤으로 자신이 끌려들어간다.
자신이 그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힌다.
뇌는 자기가 생성해낸 단어에 제한받는 생성형 인텔리젼스다.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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