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스리기

자존감 높이기

동트는새벽 2021. 8. 26. 15:40

' 당신 스스로를 더 사랑하세요. 뭔가를 잘하지 못해도, 그렇게 힘들게 노력해서 남들에게 잘보이지 않아도,
당신은 원래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나도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저렸다. 나를 인정해주며, 앞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다독거려주는 이런 말은 힐링, 위로가 되었다.

아, 내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게, 스스로를 미워해서였구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고, 두렵고, 도망가고 싶은 어린아이같은 면이 내안에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했구나. '사랑고파병'과 '인정고파병'에 걸려,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헐떡거리며 힘겨워 했구나.

내면의 소리에 귀를 더 귀울였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아프고 시리다며 흐느껴 울고, 싫다고 괴롭다고 소리치고, 자신에게 좀 더 귀기울여 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누가 왜 자신의 가슴에 이렇게 큰 구멍을 뚫었냐며 소리를 지른다. 엄마, 아빠가, 남편이, 와이프가, 아이가, 친구가, 회사동료가, 옆집 이웃이..결국 내가 아는 사람들이 용의자로 올랐다. 내면에 어중간하게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 버린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로 자존감을 높이라는 힐링의 글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도리어 내면의 요구를 하는 녀석의 실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과 거리를 두고, 가급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했다

내면의 이 철없는 것은 맛난 음식, 외모가꾸기, 음악듣기, 술마시기, 취미, 돈벌기에 몰입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변호하는 자기연민과 자기합리화, 기만, 가식, 허영을 떨어댄다.

'나의 이 모든 행위는 누군가 나에게 뚫어놓은 가슴의 구멍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가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나는 이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고 있어'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중이야. 나를 비난할 수는 없어'
'나는 소중하게 존중받아야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무시당해'
'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되는 일이 없는거야. 나는 형편없는 놈이야'
'이것봐. 세상은 노력과는 상관없어. 잘난부모를 만나거나, 못된 짓을 하거나, 도박, 투기를 해야 돈을 벌게 되어 있어'

이것이 나의 자아의 모습이었다. 이놈의 비위를 맞추는게 힐링의 정체였다. "외롭고 힘들었지? 너는 혼자가 아니야.용기를 내" 할 때 가슴이 찡해지는 녀석의 정체였다.

보통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의 요구에 귀기울이고, 자신내면의 만족감을 기준으로 판단하라고 한다.

하지만 버릇없는 성인이 되어버린 이 자아의 비위를 맞추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자존감을 올려주지는 못한다.

이 녀석은 어른이 되었음에도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며 바닥에 누워 떼쓰거나, 놀이 공원 귀신의 집에서 무섭다고 울어대고 있다. 좋은 건 '계속 줘', 싫은 건 '도망쳐' 소리치며 말이다.

진정으로 자존감을 높힌다는 것은 자아의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출발은 현재 자아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형편없다면 형편없는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가슴에 허전함의 구멍을 뚫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무지로 인해, 욕망을 키워 결핍의 구멍이 커진 것 뿐이다. 구멍의 시작은 유아기 때 어머니의 사랑부족으로 생긴다. 하지만 그 구멍을 키워온 것은 나 스스로다. 그리고 그 구멍을 메꾼다고 바보같고, 형편없는 짓을 해대고 있는 것도 나이다. 사실은  나 스스로도 내면에서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에 눈을 감고 자존감을 올릴 수는 없다.

그 구멍을 제대로 없애는 것도 나의 몫이다. 정확하게는 구멍을 메우는 것이 아니다. 구멍의 경계를 만든 욕심을 버리면, 구멍은 자연히 없어진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존감을 높히는 방법이다.
하지만 한단계 더 나아가면 자존감이라는 말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사는데는 이유가 필요없다. 이대로 충분히 만족하고 더 이상 바라지 않는 것만으로 자존감은 상관이 없어진다.

뭐 대단한 걸 하는 것처럼 삶은 심각하다고 하지만, 결국 삶이란 자아의 습관적인 감정놀음에 불과하다. 이 놀음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허망하고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공' 하다고 하는 것이다. 완전한 자유를 얻는 다는것은, 좋고, 싫고의 태그 붙이는 이 악습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완전한 자유를 얻은이에게는, 그를 규정짓는 어떤 관념, 언어, 단어도 불필요하다. 진짜로 주인의 삶의 살게된 자, 해탈한 사람에게는, 자존감과 자존심 어떤 개념도 단순한 감정놀음에 불과한 의미없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남이 인정하든, 내가 스스로를 인정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세상이라는 풍경을 보고, 좋네 싫네 화를 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사실은 나조차도 그 세상을 이루는 조그마한 풍경에 불과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