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삶의 의미, 직업의 의미
삶은 꽃길이 아니다.동물의 삶을 보면 안다.먹고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하다못해 우리집 강아지 참깨도 먹으려고 갖은 아양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물은 환경이 주어지면 그 환경내에서 적응하며 살아간다. 힘들면 힘든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자극이 오면 자신의 습성대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눈앞에 좋은게 보이면 달려들고 싫은게 보이면 도망간다.그들에게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안든다면 참을수도 있고 삶의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댓가로 치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선택의 괴로움이다. 선택할때 괴롭다. 선택을 의심하면서 괴롭다.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괴롭다.
이렇게 괴로우니 차라리 동물처럼 운명이 정해주는 단 한가지 삶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부잣집 강아지로 태어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대체로 우리는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한 방향, 돈 많이 벌고 일 적게 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재벌집 아들로 태어나면 이런 방법으로 사는것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는 여건 좋은 집에서 우월한 외모유전자로 태어나 훌륭하게 양육된다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운이 좋거나 여건이 맞는 사람들은 통상적인 의미로 앞서 나간다. 운명의 점지를 받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자라고 믿으면서 살아간다.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조건외에는 제대로 자유를 행사하면서 사는것일까?
인간은 평생 꽃길을 찾아 헤메인다.하지만 꽃길만 있는 삶은 없다. 삶은 주로 긴 고난과 고통, 그 뒤의 짧은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난을 겪어내면 잠깐의 기쁨이 찾아온다. 하지만 길지 않다. 기쁨은 고난, 고통과 함께 찾아온다. 상사병의 고통이 있어야 연애가 즐겁다. 백내장의 불편과 수술의 고통이 있어야 밝은 세상을 보게 되는 기쁨이 있다(지금 백내장 수술후 회복실에서 이 글 쓰고 있음) 삶의 많은 부분은 고난과 고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척한다.
강아지는 꽃길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통증의 순간은 있지만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꽃길을 기대하기 때문에 괴롭다. 꽃길이라고 믿으며 선택했는데 고난과 고통이 있으니 괴로운거다.
인간이 동물보다 더 낫게 살수는 없는가? 있다. 꽃길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고난을 선택하는 것이다.세상과 사회와 교육이 나한테 제시한 운명적인 고난이 아니라, 내가 겪을 고난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같은 결론일지라도, 자신이 숙고하고 내린 결정이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내가 선택한 고난은 참을만하다. 남이 정해준 고난의 길을 가면 조금만 힘들어도 불만이 생긴다. 그러니 주체적으로 자신의 고난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의외로 싶다. 내 마음이 원하는 고난을 선택하면 된다.
원하는게 돈이라면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경력을 쌓는데 도움이 되는 고난을 선택하면 된다. 돈을 벌려면 기술이나 능력이 있어야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귀챦음을 이겨내야 하는 불편함, 하기 싫은 공부를 참는 고난을 선택하는거다. 내 마음이 원하는게 마음의 편안함이라면 , 사회적 무시 근검 절약 단순 검소한 삶의 고난을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사실 어떤 길을 가도 고통의 크기는 같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편하게 산 사람은 조그마한 고난도 더 고통스럽게 느낀다. 고난의 종류와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모든 인간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의 총량은 일정하다. 고통 총량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일정량의 고통을 경험해야 그 그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고난의 종류는 행복과 관련이 없다. 고난과 고통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고난은 고통이라는 내적 경험을 유발하는 트리거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고난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과제로 느껴진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기 위하여 대가를 치른다. 생명의 대가가 고통이라는 내적 경험이다.
누구에게나 처음 겪는 일은 힘들다. 그래서 고난이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난이 반복되면 고통은 잦아든다. 고통에 면역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번 고난을 극복하면 다음 고난은 쉽다.
큰아들은 군대라는 첫번째 고난을 겪었고 직장이라는 두번째 고난을 겪고 있다. 이 고난들이 나중에 보면 나를 성장시키는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될거다. 둘째 아들도 나름 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이야기를 잘 안하니 모른다. 아마 학창시절과 군대에서 나름의 고난과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스스로 고난을 선택해야는 시기다. 붕어빵을 팔던가 유학을 가던가 노가다를 하던가 세계여행을 가든가 '자신이 겪을 고난을 살펴보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겨봐야 하는 것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해야한다. 20대에는 이런 저런 고난을 겪어보며, 어떤 고생이 그래도 견딜만한지 찾아보는 시기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에 대한 면역력도 키워진다. 이것이 도전이다.
최악의 선택은 고난을 회피하고 뒤로 자꾸 미루는 선택이다. 이것은 예방주사를 맞지 않는 것과 같다.
코로나에 적응하려면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 예방주사를 맞지 않고 병에 걸리면 죽을수도 있다. 빨리 고난을 찾아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인생의 숙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고통은 어차피 치뤄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이걸 받아들이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다. 이것 이상의 동기부여는 없다. 하지만 이 현실을 못받아들이면 계속 눈치만 보면서 선택 장애가 온다. 그러면 운명이, 세상이, 내 인생의 방향을 선택한다. 나는 끌려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끌려가면 불평불만이 생겨서 두배는 고통스러워진다. 불평불만은 고통을 뻥튀기하는거다. 물론 안다고 하루아침에 불평불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면서도 불평불만을 하면서 고통스럽게 산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난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 위한 노력은 죽는날까지 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