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소, 신포도 작전
몇년간 일본에서 산적이 있는데, 그 때 한국에 있는 아파트를 팔았다. 15년이었을 거다.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다. 어설픈 미니멀리즘 때문이었다. 나에게 달라붙은 모든 것들이 혹과 집착처럼 느껴졌다. 필요없는 것들을 정리하자 기분이 산뜻해지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집도 팔아버렸다. 집을 불살라버려야 진정한 노마드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충동조절장애였다는 것을 아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는 말로는 동의했지만 상심했었다고 했다. 아내에 대한 배려가 없이 나의 기분이 좋아지기만을 바랐던 것을 보면, 단지 자아의 소아병적 자기만족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19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집을 살려고 돌아다녀 보니 팔때보다 상당히 올랐다.
전세와 매매가 차이가 없었는데, 잠시 고민하다 전세로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 때 안샀나? 후회가 된다.
조그마한 평수라면, 지금이라도 살 수는 있다. 그리고 크기와 상관없이 내 집을 갖고 있어야 지금같은 인플레 상황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질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살까? 하고 고민을 한다.
옛날에 살던 동네로 다시 이사왔다. 내가 판 가격이 있기 때문에 오른 가격으로 산다는 것은 왠지 억울한 느낌이다. 심리적 편향이지만, 헤어나오기는 쉽지 않다.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업무외 얘기는 온통 부동산 이야기 뿐이라 안 들을 수도 없다.
나에게 조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쌀때야.
그 소리를 듣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죽기전까지 지금 집값이 가장 쌀때인가?
구체적인 근거는 댈 수가 없지만 왠지 내 인생에서의 경험과 그로부터 축적된 고정관념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안 사고 있다. 다른 뭐 고상한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나에게 조언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더 좋은 곳 찾고 있다고 말한다. 나를 염려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지만 안그러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그러면서 시간은 가고, 올해 둘어와서 몇달 사이 아파트는 두배로 뛰어버렸다. 인플레는 천재지변 수준이다. 돈이 많이 풀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물난리를 일으킬 정도로 많이 풀었나? 수해를 당했으면 모두 다 당했기 때문에 그나마 서로를 위안하고 있겠지만, 주변사람들 대부분은 똑똑하게도 좋은 위치에 더 큰 집을 샀기 때문에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줄 수 밖에 없다. 아파트 소유여부에 따라 반대로 갈린 욕망들이 부딪힌다. 젊은이들은 불안해한다. 그러다가도 아파트를 사는 순간 180도 자세가 바뀐다. 세금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마음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러다 가끔 내 자신에 대한 자책과 함께,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시리고 아플때가 있다. 아마도 이 느낌은 나에게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강박을 가져올 것이며 나는 또 유튜브나 책을 보며 한숨을 짓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이라고 유튜브의 경제구루들 모두 합창한다. 나름대로 헷지를 한다고 주식을 사기는 하지만 변동성이 크다. 역시 한국에서는 아파트다라는 생각이 든다.
'내 무의식이 불안하구나. 남들과 비교하며 가슴에 구멍이 뚫렸구나. 가슴이 시리구나. 불안을 탈출하라는 신호구나. 이 신호에 좀비가 반응하고 있구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시작되는구나. 부동산 어플을 열고, 유튜브 부동산 전망을 찾는구나. 그렇다고 사는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구나. 투자는 하고 싶고 책임은 지기 싫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구나. 그렇게 엉거주춤 서 있는 자신을 자책하고 비난하며 자존감까지 추가로 떨어뜨리고 있구나. 어리석구나.
하지만 여기서 또 불안을 피해 도망가봤자 또 다른 불안이 존재한다. 금리가 오르면 대출금을 걱정할 것이고 집값 하락걱정에 전전긍긍할 것이다. 집과 인연이 있다면 그 인연이 나를 찾아올 것이다. 내가 충동과 두려움에 쫓겨서 열심히 노력해서 했던 의사결정들이 얼마나 잘 들어맞았나?
그냥 숨만쉬며 가만 있어라'
이렇게 읊조리면 보통은 평정심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가끔 마음 다스릴 찬스를 놓치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깊숙히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그럴때는 뒤늦게나마 노력 해보지만, 이미 너무 가버렸기 때문에 의식의 방향을 돌려놓기가 쉽지 않다.
부동산과 인플레이션이 미디어와 사람들의 대화에 자주 오르다 보니, 이런 경우가 꽤 있다. 아마 나와 같이 망설임과 후회, 욕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못난 사람도 꽤 있는 것 같다.(사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이것이 자아의 모습이다. 우리 뇌안에는 충동과 두려움 전기자극 유발 소프트웨어가 자리잡고 있다. 저절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그 프로그램의 노예이다.)
이럴 때, 모든 집착을 의미없게 만드는
극단적인 마음 다스림 방법이 있다.
죽는날을 생각한다. 죽는 순간에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생각한다.
'과정이 어땠든 나는 잘 살아왔다.
세상에 아무 미련도 없고 집착도 없이,
여행지를 실컷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그네가 가볍게 발걸음을 떼는 것처럼, 빙긋이 웃으면서 차분히 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가진것이 적어서 좋구나. 집착할 것들이 없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그리고 부모님, 와이프, 아이들, 형제자매들,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
그들과 못나눴던 것들을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순서대로 꼭 껴안아 줘야지.
'나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
나 자신과, 나와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것이고,
지금도 그 일을, 실컷 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행복하다.
나는 아직 아이들을 껴안고 내 곁에 와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다.
나는 아직 와이프 손을 잡고 나를 선택해줘서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따뜻하게 말해줄 수 있다.
나는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다. (슬프게도 이건 현재에선 불가능한다.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다)
형제 자매들,
친구들,
친한 지인들,
동료들
모두에게 내 곁에 있어서,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소리내어 한명 한명 이름을 부르고 '고마웠어' 라고 말한다.
그러면 가슴이 찡해지면서 모든 집착은 사라진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물의 '공'성을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은 그냥 존재한다. 그것은 우주의 입자들이 잠시 형태를 바꾼 것 뿐이며, 크지도 작지도 ,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다. 내 마음만이 널 뛰며, 욕망과 분노의 감정의 색깔을 사물에 입히고 있을 뿐이다.
사물은 본질은 아무 색깔도, 좋고 나쁨도 없이 공하다.
단지 내 널뛰는 마음에서 감정의 색깔을 지우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라. 그러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아무리 마음이 널뛰고 괴롭더라도, 1.5kg의 뇌속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들의 깜빡거림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의 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것이 어떤때는 적게 일어나고 어떤때는 많이 일어난다. 그 깜빡거림도 언젠가는 소멸한다.
욕망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나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를 다루는 능력을 원한다.
만약 내가 아파트를 사서 기쁨의 전기자극이 생성됬다면, 내게 아파트를 팔은 사람의 뇌에서는 후회의 깜빡거림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쾌락이든 고통이든 이것이 깜빡거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내가 만약 내 뇌안의 고통의 깜빡거림을 툭 차버릴 수 있다면, 타자 뇌의 후회의 깜빡거림을 방지해 준 것이다.
'깜빡거림'이 뭐란 걸 아는 내 뇌 안에서 '깜빡거림'을 감당해 주는것도 나름 의미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울 가질 때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자아의 신포도 작전을 의심해보는 것이다.
당신은 진짜로 욕망을 조절하는 능력을 원하는가? 채울수 없는 결핍의 대체 만족을 위해 욕망조절능력을 욕망하는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뿌듯하고 ,뭔가 기분이 좋아진다면 100 퍼센트 후자다.
기분이 좋다는 것은 자아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자아는 욕망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분이 좋은 걸 보니, 아직도 나는 신포도 작전을 쓰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라.
나는 어떻냐구? 기분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나빠졌다. 또 자아에게 걸려들었다. ㅎㅎ
이말을 쓰니 또 담담해졌다.
자아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기쁘나 괴로우나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