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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윤리학- 자연에 선과 악은 없다.

동트는새벽 2022. 3. 13. 21:08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정신은 인간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관념이므로, 인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대상인 신체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신체의 변용들(affectiones=감응이라고도 해석가능)뿐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인간 정신이 자기의 신체의 변용들만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 정신이 외부 사물들을 전혀 인식할 수 없고, 오직 자기의 신체만을 인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체의 변용들 중에는 외부 사물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 따라서 외부 사물들의 본성들을 함축하는 것들이 존재 하며, 인간 정신은 자기의 신체의 이러한 변용들에 대해서 관념들을 형성함으로써 외부 사물들을 인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신체의 변용들 중에서 그것의 관념들이 우리에게 외부 사물들을 현전하는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신체의 변용들을 우리는 사물들의 이미지들(imagines)이라고 부르며”, “인간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통해서 외부 물체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정신이 그 외부 물체들을 상상한다(imaginari)고 말한다.” 

그런데 개체들의 개체로서 고도의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 신체는 다수의 외부 물체들에 의해 변용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 신체를 합성하고 있는 개체들은, 따라서 인간 신체 자체는 외부 물체들에 의해서 매우 많은 수의 방식들로 변용된다.” 그래서 자기의 신체 안에서 형성되는 사물들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외부 사물들을 인식하는 인간 정신은, “인간 신체 안에서 이미지들이 동시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수만큼 물체들에 대해서 판명하게(distincte) 동시적으로(simul) 상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 신체가 매우 높은 등급의 합성체여서 다수의 외부 물체들에 의해서 동시적으로 변용될 수 있다고 해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그래서 자기의 신체 안에서 동시적으로 형성되는 이미지들의 수가 그 한계를 초과하기 시작하면, 그 이미지들은 판명하게 서로 구분되지 못하고 혼동되기 시작할 것이고, 이에 따라 정신도 사물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해서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그 이미지들의 수가 그 한계를 완전히 초과하게 되면, 그 이미지들은 완전히 서로 혼동될 것이고, 이에 따라 정신도 사물들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완전히 서로 혼동해서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자기의 신체 안에서 동시적으로 형성되는 이미지들의 수가 그 한계를 완전히 초과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만 초과하는 경우에는 어떨까?

이 경우에 인간 정신은 자기의 신체를 변용시키는 사물들 간의 질적이거나 수적인 미세한 차이들까지는 판명하게 동시적으로 상상할 수가 없지만, 그 사물 들의 보편적인 이미지들(universales imagines), 즉 그 사물들이 서로간에 합치하는 성질들이어서 자기의 신체를 더 센 강도로 또는 더 높은 빈도로 변용시키는 그런 성질들에 대해서만은 판명하게 동시적 으로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보편 개념은 바로 이렇게 외부 사물들 “모두가 자기의 신체를 변용시키는 한에서 합치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의 정신이 형성하는 판명하고 동시적인 상상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보편 개념의 대상이 사물들간의 합치점이기는 한데, 그 자체로서의 사물들이 실제적으로 합치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변용시키는 한에서 합치하는 점일 뿐이라 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부 물체들에 대한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의 본성을 지시하기 보다는 우리의 신체의 상태를 지시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의 변용들을 통해서 외부 사물들을 인식하는 우리는 우리의 신체의 변용들의 현존을 곧 그런 변용들을 일으킨 외부 사물들의 현존으로 받아들이지만, 우리의 신체의 변용들이 현존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변용들을 일으킨 외부 사물들이 현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신체의 변용들을 통해서 갖는 외부 사물의 현존에 대한 관념은 그 외부 물체의 실제적인 현존 여부와는 독립적으로 형성된다.가령 우리의 신체가 어떤 외부 물체에 의해서 변용될 때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에는 그 외부 물체의 흔적이 남게 되어, 나중에 그 외부 물체가 더 이상 우리의 신체를 변용시키지 않게 되더라도, 그 외부 물체의 흔적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의 신체의 부분이 계속해서 운동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신체는 그 외부 물체가 우리의 신체를 변용시키고 있을 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변용될 것이고, 이렇게 우리의 신체의 변용이 현존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정신은 그런 변용을 일으킨 외부 사물이 현존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사실 외부 사물의 현존에 대한 우리 정신의 관념은 외부 사물의 실제적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외부 물체의 흔적을 보유할 수 있는 우리 신체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인간 신체가 일단 한번 외부 물체들에 의해서 변용되었다면, 그 물체들이 실존하거 나 현전하지 않아도, 정신은 그 물체들이 현전하는 것처럼 그 물체들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신체 안에서 설립되는 이미지들의 연쇄에 따라서 우리의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의 연쇄도 외부 사물들의 실제적인 유사성이나 공통성과는 독립적으로 형성 된다. 이미지들의 연쇄를 지배하는 것, 그래서 관념들의 연쇄를 지배하는 것은 외부 사물들의 실제적인 유사성이나 공통성이 아니라 그 외부 사물들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시키는 빈도나 강도 같은 것들이다. “신체 안에서 사물들의 이미지들을 질서 지우는 것은 각자의 습관이다.” 따라서 우리의 보편 개념들이 사물들의 이미지들에 의존해서 형성되는 것인 한, 우리가 마주치는 사물들이 다른 만큼, 우리의 역사와 경험과 습관이 다른 만큼 우리는 서로 다른 보편 개념들을 가진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이러한 개념들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신체를 좀 더 자주 변용시켰고, 그래서 정신이 더 쉽게 상상하거나 상기했던 사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은 각자마다 달라진다.” 보편 개념은 “자주 경외하면서 고찰된” 사물들의 보편적 이미지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게 된 관념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보편 개념들은 우리에게나 모델이지 자연 자체의 모델이 아니다.

[우리는 특정 사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라는 차별적 특징을 가지고 개념으로 삼는다. 스피노자는 개체가 얼마나  사물의 무수한 특징들 중 어느 특징에 좀 더 반복적으로 노출되었는가가 이 개념에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개의 형상에 대한 개념에는 거의 차이 나지 않는 공통적 특징에 노출된다. 하지만 '개는 무섭다', '개는 귀엽다' 라는 개념은 개체의 개에 대한 경험에 크게 의존하다.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시간을 흐름으로 인식하는가?' 논의에도 추후 사용된다. 최조에 두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1이 일어나고, 연접해서 사건 2가 일어났을때 우리는 사건1과 사건2는 별개의 사건, 혹은 인과의 가능성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다음에도 사건1이 일어나고 사건2가 일어나면 우리의 신체, 두뇌는 사건1을 사건2의 원인으로 추측한다.   

 우리의 뇌는 사방이 막힌 컴컴한 방에서 들어오는 전기신호를 경험 하고 있다. 전기신호가 하나씩 들어올때마다 그의 벽에는 우주가 맵핑된다. 초기에 하나의 신호1 은 불분명하지만 많은 가능성으로 맵핑된다.  신호 2가 들어오면 신호 1은 신호 2와 100%의 관련성을 갖는다. 하지만 추후 신호 3이 신호 1과 더 연접해서, 반복적으로 입력되게 되면 신호2 타입은 신호1타입과 무관한 것으로 멀어진다. 즉 인과관계가 약해진다.   

인간이 시간을 한방향으로 흐른다고 느끼는 것은, 신호들이 순차적으로 입력될 때 그 신호들에 과거로부터 경험으로 추론된 인과관계를 재부여하기 때문이다.]

 

신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서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 하는 것과 작용하는 것은 동일한 필연성에 의한 것이다. 즉,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무한히 많은 것들이(즉 무한 지성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목적성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연성의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신은 규범적 개념들을 모른다. 자연법은 신의 명령이 아니고, 신은 명령하는 자가 아니다. 신은 입법자나 왕이 아니다. “사람들은 신을 주인, 입법자, 왕, 자비로운 자, 정의로운 자 등등으로 상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속성들은 인간의 본성에만 속하는 것들이며 신의 본성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간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인공적 사물들을 제작하듯이 신 또는 자연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사물들을 창조했다는 목적론적 가상에 빠져 있다. 그래서 “(특정한 목적 때문이 아니면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자연이 그러한 관념들에 눈을 고정시키고, 그것들을 모델들로 삼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그런 종류의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델의 개념과 덜 합치하는 어떤 일이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면, 자연 자체가 결함이 있거나 죄가 있어서 그 사물을 불완전하게 놔두었다고 믿는다.” 즉 목적론적 가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선과 악을 마치 자연 자체의 선과 악인 것처럼 여기고, 인간의 윤리 학을 자연에 적용시켜 결국 필연성의 원리에 의해 활동하는 신 또는 자연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어디선가 읽다가 스크립해놓은 것입니다. 일부의 제 생각이 주석으로 섞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