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기독교와 불교, 우상숭배와 욕망중독

동트는새벽 2021. 6. 16. 08:52

일반적 중독의 정의를 요약해 보면, '어떤 대상 또는 어떤 상태를 향한 강박적인 추구로,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추구하는 상태. 자기혐오와 후회를 동반하지만, 뇌의 H/W적 패턴의 변화와 함께 진행되어 스스로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 상태' 라고 말할 수 있다.

후회하면서도 탐닉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육체적 쾌락을 주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마약, 알코올, 담배, 섹스, 게임,
2. 정신적 쾌락을 주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타인의 존중과 승인), 돈
3. 과하게 집착하면 장기적으로 후회스러운 것들도 있다.
경제력 -> 돈에 대한 집착
건강 -> 몸에 대한 집착
순종적인 자녀 -> 자식에 대한 집착
소속감 -> 사람집착, 지위집착
즐거움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휴식 -> 게으름
정의로움 -> 자만

우리가 중독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세상의 환경이 바뀌었다. 문화가 개인의 자유와 탐닉을 옹호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욕망을 따라 사는게 행복한 삶이라는 미디어, 일상적 대화가 만연해 있다. 또한 마약, 음란물, 게임 등 중독대상을 찾기 쉬워졌다. 또한 세상이 더 불확실하고 발전함에 따라, 개인들은 불안하고 두려움에 더 내몰린다. 이 상황에서 다른 회피처를 찾게 된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개인화되고 가족적 지지는 약해지고 있다. 애정의 결핍, 외로움, 힘들고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면서 다른 회피처를 찾게 된다. 또한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생기니, 즐거움을 더 찾게 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우리를 우상으로 이끄는 것이 사탄이다. 그리고 사탄에 끌리는 개인별 성향을 죄성이라 한다. 중독은 이 자아, 에고가 욕망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므로 이 에고를 죽여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삶을 요구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기도와 성찰로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야 우리의 눈이 떠진다. 그때가 되서야 우리가 각종 욕망의 대상인 우상을 만들고 떠받들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된다. 인간적 욕심/욕망의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편안해진다. 천국이 된다. 천국에 간다. 모든 이가 하나님 말에 집중하고, 예수님을 본받게 되면 세상이 천국이 된다. 우상을 따르는 자들은 결국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불교의 관점에서 우상은 자아의 착각이다. 근원적으로는 자아자체가 착각이다.
자아는 ' 결핍이란 것은 없는데, 개체내에서 결핍이 있다고 착각하고 이를 해결하겠다고 유발된, 관성을 가진 관념 에너지'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와 차이를 보인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우주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원인과 결과의 메커니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나면 특별히 선/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을 모르면서 결핍과 욕망, 갈증의 순환고리안에 갇혀 있다면, 쳇바퀴를 탈출하고 싶어하며 질주하는 다람쥐처럼, 바닷물을 계속 마시며 갈증을 해결하려 하는 것처럼 괴로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한 삶' 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목표를 열심히 추구하면 추구할 수록,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더 괴로워지는 악순환에 빠져있다. 결국 괴로움의 원인은 잘못된 행복추구, 욕망 중독이다. 이 욕망중독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를 만들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궁극적인 지복의 모습이다. 그런 상태를 만드는 것은 기독교에서는 기도이다. 불교에서는 집중과 통찰 명상을 통해 그것을 닦는다.
결과적으로 두 종교 모두 자아를 절제하는 힘을 기른다. 그러면, 중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세상과 우주를 자신만의 경험에 근거하여 굉장히 작게 인식한다. 감각적 인지를 통해 경험된 시공간만을 freezing 시켜, 특정장소 특정시간의 스냅샷 정도로 축약시켜 파악한다. '나'라는 개념도 내 눈이라는 카메라의 광각에 한정된 한장의 사진과 깉다.
나는 이 사진속의 모습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사진속에 찍힌 나와 가족, 친척, 소유물은 현재의 모습대로 계속되야 한다라는 불가능한 꿈을 꾼다.
그러면서 '아직 노력이 부족하군,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꺼야'라며 노력한다. 애초부터 실현불가능한 욕망이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세상은 현재와는 다를 것이다. 그때 찍은 사진은 과거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나는 늙어있을 것이고 배경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며 사진에서 사라진 가족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혼란을 느끼며 왜 사진이 이렇게 변했지? 라는 의문을 갖는다.

사실은 세상의 속성은 원래 그런것이다. 계속 조금씩 매일 변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가, 어느날 마치 큰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인식한 것이다. 내 소견이 좁압던  걱 뿐이다.
만물은 조화롭고, 누군가 사진을 조작하려는 자는 없다. 나의 인식은 완벽하다, 옳다라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혼란스러운 것 뿐이다.

그렇다면 우주에 영원하고 완벽한 것은 없는가? 만약 이 대답이, '역시 특별한 것은 없다. 우주조차도 계속될지 보장할 수 없다. 내 인식은 한계가 있고, 불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자.' 라고 한다면 이 자세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만이 영원하며 세계의 형성과 자신의 한계, 무지, 욕망의 원인과 해결을 사탄의 유혹과 하나님의 권능으로 돌려놓는다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둘 다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며 자아의 정체성을 바꾼다는 특성이 있다. 기존 자아의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게 된다. 불교에서는 무지한 자신의 모습을 집중명상, 통찰명상을 통해 직시하며, 괴로움의 원인이 될 욕망의 불을 꺼나간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를 취하고 순종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의 편협된 사고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사항은,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전적으로 위탁한다.

불교든 기독교든, 자신의 괴로움을 내려 놓는 방법을 제시한다. 자신을 좀 더 정확하게 직시하고, 피조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천지창조의 피조물일 수도 있고, 삼라만상의 연기의 필연적 결과물로써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고, 세상과 대척하며 세상을 자기 뜻대로 바꾸려는 것이 터무니 없는 짓이며, 자신을 고통으로 내몬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해 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세상 본질의 연기적 원인을 좀 더 알고 싶다면 불교를, 세간의 일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은 사람은 기독교를 선택해도 좋을 것이다.

싸움중에서 유일하게 해도 좋은 싸움이, 행복싸움이다.

내가 더 행복해...
아니야 내가 더 행복해...
얼마나 보기좋은 싸움일까.
이겨도, 져도 좋으니 말이다.
상대가 행복하다는데 이것도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사람이 진정한 종교인일까?

기독교와 불교가 행복싸움을 했으면 좋겠다.

참조 : 다음의 글을 읽고 기독교가 불교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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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어,” 모든 중독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단계를 거치면서 ‘하고 싶어(want)’는 갈망(need)으로 바뀐다.
중독을 모두가 다 동의하는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능성 있는 정의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중독은 어떤 대상 또는 어떤 상태를 향한 강박적인 추구인데, 추구하는 대상이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고 여전히 추구하는 상태를 말한다.
중독을 정의한 내용 대부분은 중독성 행동이 기본적인 뇌의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포함하고 있다.

중독에 빠지는 형태는 다 다르다. 중독이라는 굴레에 빠지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넘는다.
그럼에도 몇 가지 연구를 통해 알려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들을 파악함으로 우리는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잘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독자가 추구하는 것은 변화된 신체 경험이다. 그 변화는 빠르고 강렬할수록 더 좋다. 따라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각성제, 코카인, 마약, 아편, 진정제 및 술 등이다. 음식도 리스트에 넣을 수 있는데, “힘들거나 우울할 때 찾는 음식”(comfort food)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음식은 처방전이 필요하거나 불법적인 물질처럼 효율 또는 강도 면에서 그다지 높지는 않다.

가장 강력한 감각적 체험을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섹스이다. 따라서 인류 역사 전반을 통해 섹스는 항상 중요했고 섹스 중독자와 섹스를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섹스와 관련해서는 직접 신체 접촉을 통해서, 인쇄물로 또는 디지털 형태로까지 쉽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섹스는 중독을 초래하는 중요한 유혹으로 남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비디오 게임은 최근에 생긴 욕구 대상이지만, 그 강도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스크린을 끊는 주간을 후원하는 초등학교들도 있다. 소셜 미디어는 사회적 연결을 통해, “소외”(out) 가 아닌 “소속”(in) 을 보장함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 비디오 게임도 일종의 사회적 권력을 제공하는데, 현실과 다른 세상에서 살도록 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와 비디오 게임은 일반적인 대화나 독서를 통해 경험하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신경 자극을 뇌에 가져다준다.

제어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은 “하고 싶어”, “더 하고 싶어”라고 외친다. 문화에 따라 중독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중독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개인의 자유와 개인적인 탐닉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가장 일반적인 중독성 물질도 쉽게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여가 시간이 플러스로 보장되는 사회여야 한다. 이러한 환경 안에서, 중독은 번성하고 쉽게 퍼져 나간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특별한 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일반적인 중독에 관한 관찰이다. 그런데 중독에는 성경의 렌즈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다른 측면들이 있다.

중독과 관련해서 성경이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중독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독자에게는 하나님이 아닌 중독성 물질이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된다(시 46:1). 중독에 관한 토론이 영성을 향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그런 토론이 항상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중독 문제가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독에 관한 인기 있는 보고서는 언제나 내적 고침(amends)을 강조하지만, 그 고침이 주님 앞에서의 회개를 의미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하나님을 염두에 둔 중독의 본질(Godward nature of addiction)은 성경에 나오는 우상 숭배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도 보게 된다.

첫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에서는 환경이 중요하다. 애굽 탈출 이야기를 살펴보자. 존 칼뱅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굳이 자극을 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불확실성과 고통의 시기야말로 우상을 만드는 적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평상시라면 우리는 노골적인 우상 숭배를 하기 전에 먼저 시험(test)인지 유혹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제한된 음식과 물, 눈 앞에 닥친 죽음,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연락이 닿지 않는 지도자라는 심각한 환경에 처했다. 그런 환경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시험과 유혹 중에서도 현대의 중독에서 확인된 흔한 사실은 애초에 중독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중독 그 자체로 인해 좀 더 복잡해진다. 특히 그런 성향은 중독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기꺼이 원해서 하는 원인, 즉 인간의 죄성 때문으로 보는 시각에는 성경도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성경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영향으로 성경은 “세상”을 말한다. 그건 문화, 친구, 미디어, 교사 또는 심지어 부모까지도 중독에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존경받는 이웃이 마약 거래상인 동네에서 자라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또는 집에 음란물이 있는 상황뿐 아니라 그것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정도는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유혹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힘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목을 잡고 마구 흔들어 대지 않는다. 대신 세상은 욕망을 따라 사는 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평상시의 대화를 통해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성경은 삶의 고난을 중독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꼽는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광야 이야기로 돌아간다. 인생은 힘들고 고통으로 가득하다. 거의 매 순간마다 우리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위안을 찾기 마련이다. 가능한 피난처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님 그분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유래한 무엇인가에서 찾는 것이다. 중독은 창조자 대신 창조물에 의지하는 것이다.

중독자를 돌보는 데 있어서 이런 어려움을 고려할 때, 우리는 종종 희생, 거부, 수치심 및 수많은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당신이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중독 물질에 대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과 애정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중독에 빠지는 사람 누구나 최소한 시작할 즈음에는 다 이유가 있다. 중독은 삶을, 종종 힘든 삶을 내 힘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따라서 현명한 조언자라면 중독을 일으킨 원인을 알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독자의 자세한 삶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두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구약 성경은 실제적인 우상 숭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신약 성경은 우상 숭배의 기초가 되는 욕망을 겨냥한다.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욕망은 선하거나 우상적이며 심지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갈망하거나 사랑해야 한다(신 6:5). 그것은 최고의 욕망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그럴듯하고 우상적인 것을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신 12:20)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그것은 자연스런 욕망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향한 욕망(Idolatrous desires)도 적절하게 조절만 한다면 얼마든지 자연스럽고 적절한 욕망의 씨앗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욕망의 예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 건강, 순종적인 자녀, 소속감, 즐거움, 휴식 그리고 정의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정상적이고 심지어 좋은 욕망조차도 얼마든지 크게 자라날 경향이 있다고 경고한다(약 1:15). 그런 욕망이 힘을 얻게 되면, 언젠가 우리를 상대로 만족하지 못해 날뛰는 거인처럼 싸우게 될 것이다(엡 4:19; 약 4:1).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언제라도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실제 우상에 기초한 욕망으로 초점이 바꾸는 순간, 우상 숭배라는 그물에 즉시 도달하게 된다. 보다 더 주목을 끄는 우상인 약물, 섹스, 알코올을 고려하기 전에, 성경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우상인 사람과 돈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존중과 승인을 갈구하며(잠 29:25), 또한 개인 소득에 집착한다(마 6:24). 진짜 끔찍한 우상 숭배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두 가지 숭배의 대상 위에 세워졌다.

지혜로운 조력자는 그들 자신조차도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고, 중독자와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욕망과 그 치료법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세 번째로 실질적 우상 숭배(중독)는 노예가 되는 것이고, 그 결과는 비극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우상의 특성을 닮아 가는 경향이 있다. 생명이 없는 것을 흉내 내면서 우상 숭배자들도 점점 더 속이 비어 간다.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기에 그들도 같이 거짓말을 하며(사 44:20), 그들의 인생은 점점 더 비극을 향해 나아간다(잠 23:29-35). 숭배하는 대상이 단순한 돌이나 나무 막대기이기 때문에 힘의 원천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막대기 뒤에는 악마와 동일한 종류의 이 세상의 지배자가 있다. 분명히, 악마는 우상이라는 대리자를 통해 숭배받는 것을 기뻐한다.

중독은 따라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중독자는 스스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마든지 다른 결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예이며 또 결정권이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이 세상, 육체 그리고 악마라는 삼인조에게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렇기에 중독 전문가라면 누군가가 바닥을 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독에는 명확한 바닥이 없기에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노예가 된 중독자에게 치고 올라갈 힘을 주는 바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우상 숭배(중독)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시작한다. 그분을 믿음으로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다양한 혜택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영(the Spirit of Jesus)을 받을 때에만 그 자유함은 지속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분의 백성을 우상 숭배로부터 불러내셨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광야로 가셔서 사탄이 주는 엄청난 시험 중에도 그의 아버지를 믿었을 때 우상 숭배를 향한 우리의 승리는 확실해졌다. 예수님의 능동적이면서 또 수동적인 완전한 대속으로 인해서, 그분은 율법의 형벌을 받았고 우리를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기 위해 승천했으며, 우리에게 능력의 성령을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굴복하지 않고, 오랜 노예 주인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이 싸움은 느리게 느껴지고 또 과거의 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누리는 교제와 더불어 우리는 시선을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고정하고, 시편 저자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될 때까지 그분을 알아 가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그러면 중독에 빠졌던 우리의 친구들은 축복을 받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살전 1:9).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이 말씀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각종 우상을 만들고 있는 현실을 알게 하고 또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함으로 그 이름을 서로에게 인내와 선한 마음으로 선포하게 하며, 그 결과 진리를 말하시며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을 알게 한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Addictions and Idola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