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고통이 필요한 이유
감정과 고통은 의식의 연료다
원하는게 많을 수록, 상실이 많을수록 감정과 고통은 심해진다.
그렇게 고통이 심해질 수록 우리의 의식은 또렷해진다.
생각해 보면,
갖고 싶은게 많을때 그것을 얻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고통스러울때 그것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의식이 또렷해지는 것이다.
배부르고 몸이 편안할때,
더이상 원하는 것도 없고 불만도 없을때
우리는 배를 두드리면서 아무 생각이 없다. 의식이 혼미해지는 것이다.
생각을 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감정과 고통이 필요하다.
당장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왜 하는가?
뭔가 Feel 받았기 때문이다. 무덤덤하다면 굳이 이런 의식적인 활동을 할 이유가 없다.
그저 재미있는 유튜브 보면서 낄낄거리면 된다.
이렇듯 감정은 '생각하는 인간'의 필수불가결한 동기부여 요소이다.
하지만 그 감정의 폭이 지나칠때 우리는 과다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중생은 끊임없이 의식적인 생각을 통해 무엇인가의 결론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감정생성부위(카르마, 업식)에 대입시켜 감정으로 치환해낸다.
그렇게 또 감정이 생성되면 그것을 연료로 태워서 다시 생각을 반복한다.
특히 그 감정이 괴로운 것일때 우리는 그것을 윤회라 부른다.
해탈은 이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다.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감정과 고통에 의지하고 않고 명료한 의식과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파도없이 서핑을 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어려운 일을 부처님께서는 해내셨다.
카르마의 가장 밑바닥까지 훑고 나서, 감정과 고통을 잠재우고 그 위에서 명료한 의식을 끌고 나가, 마침내 '연기'라는 삶의 이치를 '몸'으로 경험하신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삼라만상이 연기의 법칙 위에서 제 갈길을 가고 있다.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난다. 그 흐름에 내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매우 작으며 그 결과를 거의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을 100% 통제하겠다는 것이 집착이다. 그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다. 무엇이 집착을 일으키는가? 그것을 까르마라 부른다. 그것은 의식 너머 가장 밑바닥 무의식적 영역에 존재한다. 생명연장의 욕망위에서 탐진치의 충동과 감정 생각를 형성시킨다. 까르마는 자석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붙여서 자신을 비대하게 한다. 자신이 비대해질수록 집착도 커지고 고통과 괴로움도 커진다는 사실은 모른다. 고통을 느끼는 자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자신이 그 고통을 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 스스로는 알 수가 없다. 마치 눈이 눈 자신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의식이 스스로의 존재를 감각을 통해 의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집착을 일으키는 존재 또한 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형성된 것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감정을 관찰하여 평온한 상태를 만들고 이 상태에서 명료한 의식을 유지한다.
이 상태가 되어야, 삶에 집착하며 끊임없이 감정과 생각을 생성해 내는 카르마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
이때가 되어야 비로서 의식이 그것을 염오하게 된다. 한마디로 정이 떨어지면서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어쩌면 '욕망을 포기한다'라는 표현이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경험이 자신의 삶에 대한 의욕과 의미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집착, 기어코 오래살고 누구보다 잘살아야겠다는 집착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과, 자신의 삶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